BOARD

라이브 소식

News
[연합뉴스] 그 편지는 팬레터일까, 러브레터일까...뮤지컬 '팬레터' 2019.11.16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예술혼과 사랑


'김해진'을 연기한 이규형. 지난 시즌 공연 장면
'김해진'을 연기한 이규형. 지난 시즌 공연 장면

[라이브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역사적 사실과 상상을 결합한 흥미롭고 탄탄한 스토리, 멋스럽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 1930년대의 모던한 분위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넘버(노래)는 130분간 관객을 흠뻑 빠져들게 했다.

지난 7일부터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선보이는 '팬레터'는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창작뮤지컬 공모 프로그램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시즌1'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이다.

2016년 동국대이해랑예술극장 초연 당시 좌석 점유율 90%를 기록했고, 이듬해 중국 왕자웨이(王家衛·왕가위) 감독 투자를 받아 화제가 된 동숭아트센터 재연 때는 관객들이 티켓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고도 한다.

 

어둠 속에서 정세훈을 바라보는 히카루와 김해진
어둠 속에서 정세훈을 바라보는 히카루와 김해진

[라이브 제공]

작품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경성(서울)을 무대로 당대 최고 문인들의 예술혼과 사랑을 그린다.

동경 유학생이자 작가 지망생 정세훈은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김해진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유학 생활을 접고 돌아와 순수문학 모임 '칠인회'에서 조수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김해진이 있다.

히카루를 여성으로 착각한 김해진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편지만 주고받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정세훈은 자신을 속이고 히카루의 실체를 숨긴 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김해진의 집착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김해진과 히카루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정세훈, 김해진이 좋은 작품을 쓰도록 다그치는 또 다른 어두운 인격체 히카루, 그들 사이에서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히는 김해진 모습은 관객을 숨죽이게 한다.

정세훈과 히카루의 갈등이 극단을 향해 가며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에서는 소름마저 돋는다.

'칠인회' 멤버들. 지난 시즌 공연 장면
'칠인회' 멤버들. 지난 시즌 공연 장면

[라이브 제공]

또 다른 관람 포인트는 1930년대 실재한 순수문학 모임 '구인회'를 모델로 한 '칠인회'다. 칠인회 멤버 이윤, 이태준, 김수남, 김환태 등은 순수문학에 대한 열정과 시대적 고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가들은 게으르고 생각 없다는 사람들 평가에 대해 "아무리 점령당한 땅이라 해도 예술마저 점령당할 수 없잖아"라고 항변한다.

소설가 이태준과 문학평론가 김환태는 실제 인물을 그대로 끌어왔고 이윤은 천재 시인 이상을, 김수남은 시인 김기림을 모티브로 말과 성격을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무대나 조명이 화려하지 않지만, 그림자를 이용한 장면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등장인물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원고지 모양 조명도 인상적이다.

그림자 연출. 지난 시즌 공연 장면
그림자 연출. 지난 시즌 공연 장면

[라이브 제공]

음향시설 때문에 대사와 노래 가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은 점은 아쉽다.

하지만 배우들 연기는 음향에 대한 아쉬움을 씻어내고도 남는다. 지난 13일 무대에서 김해진을 연기한 이규형은 극 흐름에 따른 다양한 감성을 섬세하면서도 묵직하게 표현했다. 이용규(정세훈 역)와 김수연(히카루 역)도 선과 악의 대결을 보는 듯한 소름 돋는 연기로 무대를 압도했다.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때론 격정적인 넘버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귓가에 맴돌며 여운을 안겨줬다.

뮤지컬 '팬레터'에 붙는 '믿고 보는'이란 수식어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무대였다.

순수했던 히카루가 어둠의 존재로 변해가며 달라지는 의상도 관람 포인트다.

임동근 기자 dklim@yna.co.kr

원문 링크: https://han.gl/EYFw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