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역시 연극·뮤지컬 ‘덕후’였어요.”
김유정을 모티프로 한 소설가 김해진(김종구·이규형)을 향한 18세 작가지망생 정세훈(문성일·김성철)의 동경과 사랑을 담은 뮤지컬 ‘팬레터’의 김태형 연출은 스스로를 ‘덕후’(일본어인 오타쿠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른 오덕후의 줄임말, 마니아 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라고 표현했다.
“프로 연출로 데뷔하지 않았다면 전 여전히 덕후로 남아있었을 거예요. 아마추어 극단에 몸 담거나 직장인 연극을 하면서….”
그래서 이윤이 세훈에게 전하는 후반부 대사는 ‘팬레터’를 통해 그가 털어놓고자 했던 속내이기도 하다.
“너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지만 너 때문에 며칠을 더 살았을 수도 있지.”
◇ 나도 세훈처럼 연극·뮤지컬, 자우림, 후카츠 에리 ‘덕후’
김태형 연출.(사진=양윤모 기자) |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의 존재, 경성시대, 팩션, 퀴어물은 아니지만 두 남자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등 ‘팬레터’는 최근 공연 트렌드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게다가 (이전 연출작) '아가사'가 비슷한 테마이기도 했죠.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연출로서 제가 해야할 일은 이 극의 미덕을 발견하고 강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이에 김태형 연출은 세훈 캐릭터를 통해 일방적이고 몰래하는 사랑, 자신을 감추고 다른 누군가로 동경 혹은 사랑하는 이야기를 슬프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일로 보일 수 있게 풀고자 했다. 시대와 성별, 금기될 수 밖에 없는 관계, 숨기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그 지점에 집중했다
“‘팬레터’에서 제일 처음 만난 미덕이 그거였어요. 세훈이의 감정은 해진에 대한 동경과 존경에서 사랑으로 발전해가고 그것이 이뤄질 수 없어 부정되고 철저하게 버림받았죠. 하지만 마지막에 한켠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드라마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무언가를 만들고 관객들의 반응을 얻고 그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며 연대감을 형성하는 게 제가 살아가는 큰 힘이에요. 창작자로서는 판타지죠.”
그에게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다. 당신 공연 덕분에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거나 잊었던 꿈을 다시 찾았다는 등 관객들의 피드백을 만나는 순간은 그에게 감동과 엄청난 책임감의 교차점이기도 했다.
뮤지컬 '팬레터'.(사진제공=벨라뮤즈) |
뮤지컬 ‘팬레터’는 창작자이자 연출자로서 김태형이 그 지점에서 시작한 작품이었다.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대사들이 여러 번 변주되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팬레터’는 공연을 사랑하는 팬들의 이야기 같아요. 해진을 보면서 눈물이 난다고 노래를 부르거나 동경 혹은 사랑하는 세훈의 마음을, 해진이 편지를 통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할 만큼 알고 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테마였죠. 당신들이 하는 말이 때론 듣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 사랑을 잘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고. (이윤의) 그 대사처럼 살아가는 큰 힘을 준다는 게 ‘팬레터’의 가장 큰 미덕이었어요.”
누구나 세훈처럼 무언가에 빠져드는 ‘덕후’일 때가 있다. 김태형 연출 역시 한때는 공연 마니아였고 자우림과 김윤아에 열광했으며 일본 배우 후카츠 에리에 한눈에 반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태형 연출은 “덕후를 위한 공연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이데올로기 혼재의 경성시대도 역시 사람 사는 곳
김태형 연출.(사진=양윤모 기자) |
“그래서 시대적 고증이나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데 덜 집중했어요.”
뮤지컬 '팬레터' 중 해진(김종구)과 세훈(문종일).(사진제공=벨라뮤즈) |
‘팬레터’는 주인공인 해진의 모티프가 된 김유정을 비롯해 이상(극중 이윤), 이태준(극중 이태준), 시인 김기림(극중 김수남), 평론가로 주로 활동했던 김환태(극중 김환태) 등 9인회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작품세계 등 역시 철저히 고증하지는 않았다.
◇ ‘덕후’ 그리고 ‘창작자’ 김태형의 ‘덕후찬양’
역사에 실존했던 9인회를 모티프로 한 뮤지컬 '팬레터' 중 칠인회.(사진제공=벨라뮤즈) |
“작가나 예술가, 창작자, 배우 등과 관련된 공연을 할 때는 늘 조심스러워요. 자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창작자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닌, 보편적으로 통할 정서는 무엇일까를 고민했죠.”
그래서 끌어낸 것이 자기 좋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는 시대다. 경제 위기, 사회적 문제 등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사는 지금의 시대가 검열, 상실감, 사상적 목적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다고 믿었다.
“먹고 살기 힘들고 검열이 있지만 독립운동이나 사상적 활동이 아닌 순수문학을 하겠다는 칠인회가 비겁한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으면 했어요. 목적이나 경제적 필요, 공공기관이나 관에 의한 요구, 대중성 등이 아닌 순수한 예술로서 추구되는 문학도 분명 가치가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팬레터’에서 모더니즘은 꽤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역사, 문화 등이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일제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고 사상과 이데올리기가 혼재하는 시대. 이 시대를 김태형 연출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그 시기는 예술가나 문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굉장한 괴리감과 혼란을 겪었을 시기다. 최근 경성시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너 때문에 살 수 있네’라는 해진의 대사처럼 관객들 사랑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는 걸 큰 테마로 잡고 싶었어요.”
김태형 연출.(사진=양윤모 기자) |
그래서 ‘팬레터’는 자기 분열과 작품활동을 통한 세훈의 성장담이다. 봄날 같다고 말하는 첫사랑, 처음으로 동경하는 누군가 만나고 아픔을 겪고, 히카루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성장하는 드라마에서 김태형 연출은 ‘덕후’들을 떠올렸다.
“작가로서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빠져들었다가 빠져나오고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그게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 시대에 순수예술과 문학을 꿈꾸던 문인, 예술가들. 자기 생을 바쳐가며 쓴 문학, 소설 등이 자양분이 돼 현재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잖아요. 우리가 그나마 덜 삭막하게 문화예술을 향유하면서 즐기고 있잖아요. 괴로운 시대에서도 그걸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들, 세훈과 해진의 관계로 변주돼 보이지만 같은 이야기죠.”
그 역시 세훈처럼 브레히트에 빠져 공연계로 방향을 전환했다. ‘서푼짜리 오페라’, ‘사천의 선인’ 등을 공부하면서 이 사람처럼 할 수 있다면 연극도 ‘일로’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단다.
“연극이 취미활동이나 고상한 예술활동만이 아니라 혁명의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의 형식과 기법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잖아요. 그게 멋있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었죠.”
◇ 여전히 ‘덕후’로 ‘창작자’로 꿈을 꾼다
김태형 연출.(사진=양윤모 기자) |
“해진이 한편으로는 불쌍했어요. 뻔히 알면서도 용감하게 세훈을 받아들여주지 못하고 그렇게라도 글을 쓰고자 했죠. 허상과 거짓을 믿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버티잖아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아요. 헛된 희망이라도 갖지 않으면 마냥 힘들죠.”
‘베헤모스’는 누구나 괴물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데 주목한 이야기로 제목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그리스 신화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사람을 죽인 재벌 2세를 중심으로 누군가는 그를 변호하고 또 누군가는 그를 응징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